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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시종 이메일 ksjong4321@hanmail.net
작성일 15.04.01 조회수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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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뫼산 호랑이도 슬피 울다 죽었다.
                                         한뫼산 호랑이도 슬피 울다 죽었다  

                                                                                   김시종  

                                                                                    ksjong4321@hanmail.net

 

  한뫼산은 밀양에 있는 애림 서원을 병풍같이 둘러쌓고 있다.

한 산맥은 동쪽으로 뻗어 추원제를 감싸고 있으며, 추원제는 문충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태어난 생가이다. 뒷산이 한뫼산으로 밀양시 부북면 대제리(한골) 마을이다.

  김종직 선생은 외가 곳인 한골에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는 김 선생의 신도비가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하다.

  김 선생의 선고이신 강호 김숙자 선생은 鄭夢周, 吉再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은 영남 학맥을 이었고, 강호 선생과는 부자지간이면서도 스승이시다.

  강호 선생의 태몽에 지금의 구미시 원평동 밭에서 일하고 있을 때 태양이 입안으로 들어오는 태몽 꿈을 꾸고 잉태한 자식이 文忠公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다.

부친인 강호 선생은 선산 출신이나 1420년 봄 밀양 박씨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 중 3남(세종대왕 13년 辛亥, 1431년 6월 庚子 日 甲申 時)에 출생했다. 강호 선생의 부인이 무남독녀로 선생은 양가 살림살이를 하게 되자 처가 곳인 밀양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5세 때 감천(도랑)에서 가재를 잡으며 물놀이를 하고 있을 때 흰 도포를 입은 신선 같은 대사가 죽장을 집고서 “장래 대학자가 될 사람이 도랑에서 가재를 잡고 놀고 있다.”는 일화가 전해 오고 있다.

  김 선생은 6세 때부터 선공으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동문 수지, 유학자설, 정속 편을 모두 배운 뒤 소학, 효경과 사서오경을 배웠고, 통감과 역사, 백가의 서적을 탐독했으며, 활쏘기와 글씨 및 계산법까지 배웠다.

  김종직 선생은 12세부터 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세종 28년 (1446년) 16세 때 과거에 응시하여 백룡부(白龍賦)를 지었는데 합격하지 못했다. 귀향길에 한강의 제천 정에 詩 한 수를 씌어 놓았는데

雪裏寒梅雨後山 看時容易畵時難 早知不入時人眼 寧把臙脂寫牧丹

(차가운 눈 속에 핀 매화를 볼 때는 쉬우나 그릴 때는 어렵나니

일찍 세상 사람들의 눈에 들지 않을 줄 알았다면 차라리 연지를 쥐고 목단 꽃을 그릴 것을.)

  당시 시관이었던 태학사 김수온(金守溫)이 기이하게 여기야 “이는 뒷날 문형(文衡)을 잡을 솜씨인데 높은 인재가 낙방한 것이 애석하다.”하면서 낙방한 시권을 세종대왕에 아뢰었더니 기특하게 여겨 영산 훈도로 임명한 바 있었다.

  세종 30년 18세 때 서울에 머물며 남학(南學)에 소속되어 선공의 명을 받아 성리학에 몰두하면서 문종 원년 21세 때 창녕 조씨 울진 현령 조계문(曺繼文)의 딸에게 납채(納采)하였고, 매계(梅溪) 조위(曺偉)는 부인의 아우이다.

  단종 원년 23세 진사에 합격한 후 겨울에 초례를 지냈다. 세조 원년(1455년) 동당(東堂) 시에 합격 하였다. 세조 2년 선공의 상을 다하여 밀양시 서쪽 고암산 분저곡에 장사를 지내고 백씨, 중씨와 함께 여막을 짖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세조 4년 상복을 벗고 몇 칸 집을 지어 명발와(明發窩)라 이름하고 경전을 연구 “이존록(彝尊錄)을 지었다. 모부인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가을에 별시(別試) 초시(初試)에 합격 하였고, 이듬해 봄 문과에 급제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잔치를 열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성종 2년 김종직 선생 41세 정월 상순에 조령을 거쳐 함양 임지로 갔다. 함양 상림공원 누각에 걸린 유자광(柳子光)의 현판 글 내용이 고운 최치원 선생과 부합되지 않은 현판 글이므로 떼어 보리밭에 던져 버린 일이 있었다.

  훈구파인 유자광은 현판 사건으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에 대한 사감을 품으며 기회를 노리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선생 사후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춘추관의 사관이 되어 훈구파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에 기록한 일 때문에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반목이 더욱 심했다. 무오사화를 일으킨 원인은 훈구파와 신진 사류 사이에 갈등 때문이지만 그 직접적인 동기는 김종직 선생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이 빌미가 된 것이다.

  김 선생은 성종 23년 (1492년 7월 19일) 다른 사람의 서책을 돌려주고, 8월 19일 명발와에서 역책(易簀)하셨다. 사후 6년이 지난 뒤 훈구파에 의해 참화를 당한 사건이 무오사화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도학사상이 사화의 발단이 되어 부관참시를 당한바 조의제문에 잘 나타나 있다.

  김 선생의 꿈에 초나라 회왕 손심이 나타나서 자신이 서초패왕 한우에게 죽임을 당해 강에 잠 겼(던져 졌)다고 하여 회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지은 글이다. 여기에서 진시왕은 세조, 초나라 회왕은 단종이라 할 수 있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 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후세 사람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 하는 도학자로서 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산군 4년(1498년)「성종실록」을 편찬하게 되자 유자광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김종직 선생의「조의제문」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는 일을 비방하여 지은 글이라고 고해 받쳤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와 신진사류 간에 심오한 갈등 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동기는「조의제문」이라고 역사는 전 하고 있다.

  숙종 15년(1689년)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숙종 35년(1709년)문충공으로 복시되었다.

  조선 유학의 정맥이며 사림의 조종(祖宗)이신 문충공(文忠公) 점필재(佔畢齋) 김종직 선생의 현재 유택(幽宅)은 한뫼산 동록(東簏)에 있다.

  무오사화 후 이장된 묘역으로 517년 만에 후손들에 의해 묘역 중창(重刱을 할 때 기적비문과 연보비를 세우고, 유림 1,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고 엄숙한 중창식을 갖인 바 있었다.

묘역 성역 작업시 성관(聖棺) 앞 쪽에 고책을 태운 잿 가루가 몇 자루나 쏟아져 나왔고, 궤짝에 담아 묻었든 관(棺)은 삭아 없어지고 궤를 만들 때 사용했던 한 뼙 되는 삼각형 쇠못 8개가 출토 되었다.

  밀양 민속 박물관에 4개, 부산대학교 점필재 연구소에 2개, 고령 개실 마을에 2개 씩 나누어 보관하고 있다. 기이하게도 부관참시 후 한뫼산 자락에 이장 한 후 여산 대호가 날마다 무덤 옆에서 슬피 울다가 어느 날 선생의 묘지 옆에 호랑이가 죽어 있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양지 바른 곳에 장사를 지내 주었다. 호랑이 묘지를 만들어 준 후 이상하게도 마을에 도둑이 없어졌다고 한다.

  후손들은 의호총(義虎塚)에 인망호폐(人亡虎斃)이라는 의호비(義虎碑)를 세우고 의관을 바로 하고 시혜(施蕙)하는 마음으로 예(禮)를 다하고 있다.

 

 

선생의 생애, 사상, 저서, 제자, 교지, 유품, 서원 등은 생략.

易簀: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

    納采:혼인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으로 예물을 보냄

    別試:조선 시대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병년 마다, 보이던 문무의 과거.

    初試:조선 시대 문과, 생전 시, 무과, 잡과 등의 첫 시험

    重刱:학덕이 높은 사람의 묘를 새롭게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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