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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동섭 이메일
작성일 11.11.26 조회수 2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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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 동해-일본해-백제해
동해-일본해-백제해
이동섭
미 국무부 “마크토너” 부 대변인은 “연방정부기관 지명위원회 (BGN) 표기방침이라면서 미국의 해양지도상에 동해(EastSea)를 일본해(Sea of Japan) 로 사용한다고 밝혔다.
“우리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일본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미국은 BGN에 의해 결정된 표기들을 사용하는데 해당해역에 대한 BGN 의 표기는 일본해 라고 말했다.”
우리의 짝사랑인 동맹국 미국은 기회 있을때 마다 일본의 입지만을 세워주고있다
사실 동해는 중국 러시아 일본 한국 대만 등 여러 나라와 인접한 바다다. 역사상 이 바다는 동해로 통용이 되고 있으니 동해로 현재까지는 통용되고 있는데 왜 일본해라는 엉뚱한 미국의 유권해석이 나올가?
 
우리나라가 미국을 동맹국으로 삼은 것은 1882년5월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1조 不公輕侮 必須相助-국제관레에 어긋나는 간섭을 할때 필히 돕는다는 약속)을 체결한 이후다
일본이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를 합병하려 하자 마지만 황제 고종은 이국만리 에 있는 동맹국 미국에 도와달라는 구명밀사를 보낸다. 하지만 미국은 이날도 일본과 도꾜 밀약으로 조선을 일본에 넘겨주는 협약을 체결했다.
대륙진출을 꿈꾸는 일본 은 우선 조선을 합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을 합방시키려면 종주국인 청국을 무너뜨려야 한다. 일본은 1894년7월에 청국과 일전을 벌려 청국을 쓰러트렸다. 시모노새끼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청국이 조선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협약을하고 조선을 독립시켰지만 (대한제국 황제로) 그러나 고종은 일본의 위장된 독립에 속지않고 러시아국에 의존하려했다. 그러자 일본은 1904년 2월 러시아 와 일전을 벌렸다.
이무렵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러일전쟁을 수행한다면서 국내 요지의 일군수용을 인정하는 “ 한일의정서” 를 내고 이어 8월에는 제1차 한일협약(재정,외교를 탈취)을 체결하였다.러일전재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5년 11월에 제2차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 함 으로서 조선의 외교권과 재정권을 약탈함으로서 사실상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영의정 민영환과 한규설은 그나마 미국에 구원밀사를 보내여 보기로 했다. 그래서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동안이나 수감중인 이승만을 특별 사면시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밀사로 보내기로 한것이다.
이승만은 고종퇴위운동을 하다가 역모죄로 한성감옥에 수감된 반국가사범인데도 당시 영어를 할만큼 유능한 외교관이 없었다. 임무를 띠고 1904년 11월4일 인천에서 오하이오호편으로 출발하여 11월29일에 호놀롤루를 거처 11월30일에 시베리아호 편으로 샌푸란시스코를 경유하여 1905년 12월31일 워싱톤에 도착한 이승만은 초대 주한공사를 지낸바 있는 친한파 휴 딘스모어 (Hugh Dinsmore) 하원 의원을 찾아가서 민영환 한규설의 소개서를 보이고 그의 안내로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할 수가 있었다. 뜻을 전해 들은 헤이 국무장관은 <나는 미국정부를 대표하여 그리고 나 개인의 자격으로 언제든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우리조약에 의한 의무를 수행하기위해 모든 힘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아주 시원시원한 대담을 주면서 대통령접견도 주선해 주었다.
이승만은 필라델피아 애 들려서 서재필박사의 조언을 듣고 러일간의 전후 강화조약(포스머스겅화조약)이 열리기 전날 에야 겨우 루즈벨트대통령을 접견하게 되었는데 루즈벨트대통령은 이승만이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왔다고 하자 고종의 밀서는 정식 외교경로가 아니라는 이유로 접수를 거절하고 동맹국의 예우는 하겠다며 밀사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그래도 루즈벨트에대한 기대를 하고 나왔는데 그 시각에 루즈벨트는 육군장관 월리엄 H 태푸트를 동경에 파견하여 일본의 전권대사 가쓰라 와 “미국이 조선을 일본의 속국으로 인정하는대신 일본도 필리핀은 미국의식민지로 인정한다는 밀약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의 믿음은 거기서 멎질 않고 다음날 러일강화조약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양국 대표에게 조약문안에 ”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보호권을 인정 한다“ 는 내용을 첨가하라는 권고 까지 했다는 것이다.
루즈벨트가 생각한 조선이란 나라는 일본에 비하면 미개하기 짝이 없는 힘없는 나라에 불과 했던것이다.
그의 조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대한민국 재건에도 무척 어려움을 준다.
루즈벨트는 조선 독립에 대하여 미중소가 20년이상 내지 30년간 신탁통치를 거친후에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1945년 4월 12일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트루먼은 한발 더 앞선 민족주의 신봉 대통령이였다.1945년 12월 16일 모스코바에서 미,소,영 외상들의 삼상회담에서 미국의 번츠국무장관은 조선독립에 대하여 5년 이내 혹은 10년이내 4개국 신탁통치로 독립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을 하고 이 안이 결정을 보았다.
.미국은 전후의 대한민국에 대하여 장기간에 걸치더라도 확실한 친미정권을 생성하려는 의도였는데 5년의 단기 신탁통치안이 나오자 번츠장관을 “공산주의 내통자”라고 내몰고 신탁통치를 무산시킨후 남한 점령지만으로 미군정을 실시 한 것이다..
 
45년8월 15일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는 패전국 일본에게서 빼앗겼던 강산을 빠짐없이 돌려받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것은 여러 차례 연합국의 정상회담에서 선언 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정3년을 마감하고 1948년8월15일에 이승만 정부가 수립 되였으나 반환받은 국토중 독도가 최후로 체결된 대일본 강화조약의 문안에서 사라진 것이다.
미군정이 끝나고 정부를 수립하자마자 625 전쟁이 발발하여 신설 정부로서는 경황이 없는데 발표된 샌푸란시스코의 대일본강화조약체결이다.
 
초안은 미국인 이 작성하지만 11개 동맹국대표가 동의해야 하는데. 최초 초안부터 6차안 까지 초안 <제3항>은 “한국에 반환할 영토는 한반도 본토와 그 주변의 모든섬인데 대표적잉 예로 제주도,거문도, 울릉도와함께독도(리앙쿠르바위섬) ...”으로 되었다가 7차초안부터는 독도가 일본땅으로 명기된디. 물론 이 초안은 영국 뉴질랜드 오스트리아등 연합국에 의하여 채택이 되지 못하지만 이무렵
1951년8월10일 “딘 러스크” 미국무부 극동차관보가 양유찬 주미대사 앞으로 독도의 일본땅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여 문제를 이르킨다.
“독도는 다른 이름으로 다케시마 혹은 리앙쿠르암 으로 불리는 그 섬에 대한 우리 정보에 의하면 통상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이 바윗 덩어리는 한국의 일부로 취급된 적이 없으며 1905년이래 일본 시네마현 오키도사 관할하에 놓여 있었다. 한국은 이전에 이 섬에 대해 권리를 주장 한 적이 없었다.” 라는 내용이다.
당시 외무부장관은 변영태. 깜짝 놀란 양유찬 대사가 덜레스 주한 미국대사를 항의하자 한국정부가 인정하는 위도와 경도를 10일 이내에 회보하라고 했다
일본이 독도를 리앙쿠르라고 하기 때문에 위치를 확인하려고 한것 같은데 우리 정부는 회신해주지 안했다. .
 
1952년 9월 에 선포된 샌푸란시스코 강화조약 의 문안에서 독도는 일본으로도 한국령으로도 사라지고 이문제는 당사국이 결정하라는 암시를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지명위원회를 인용 미국이 동해 마져 일본해로 정했다니 한심하다
차라리 백제해라 부르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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